태평 빈집프로젝트 『사라지지 않는 1』, 성남 원도심을 만들어온 개인들을 찾아서 태평동 빈집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 『사라지지 않는 1』은 지역에서 삶을 만들고 동네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존재를 장소에서 발견하고, 현재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을 고민해보고자 기획되었다. 1960년대 후반 국가가 주도하는 도시개발계획으로 만들어진 이후, 이곳은 누적된 시간들과 개인의 흔적들을 그 어느 지역보다도 잘 간직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팍팍한 삶을 감내해낸 무수한 개인들이 있을 터이고, 하루를 살아낸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널려 있다. 총 12팀의 예술가가 참여한 본 프로젝트는 장소특정적 설치작업과 퍼포먼스, 사운드, 사진 및 영상, 커뮤니티 기반의 프로젝트 등 총 16점의 작품 및 프로젝트가 이 지역의 총 8공간에서 전시된다. 이 작업들은 지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슈인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이 지니는 위상에 관해 사유해보는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고, 예술의 개입으로 지역사회와 주민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순간을 포착한다.
삶과 예술이 만나는 빈집, 그리고 옥상 김달 작가는 신흥동과 태평동을 포함한 수정구 일대를 카메라로 꼼꼼히 기록한 사진 아카이브 「낮과 수정구의 밤」을 선보인다. 구릉지 위 용적률 기준에도 못미치는 빡빡한 간격의 20평 집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풍경을 통해 지역의 역사를 드러낸다. '광주 대단지 사건'을 그림책 방식으로 재현한 김달·박승예 프로젝트 팀의 「스무 발자국」은 성남 원도심 생성의 역사를 기록하고 오늘날의 삶을 반추하고자 한다. 이창훈 작가의 「무의미의 의미」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에 주목하여 이제 곧 철거될 예정인 빈집에서 도배라는 일종의 제의 과정을 진행하고 기록한다. 이로써 작가는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너머 거주에 관한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박혜수 작가의 사운드 및 설치작업과 배민경 작가의 퍼포먼스로 구성된 「어둠속에 부르는 노래」는 어떠한 이유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에 관한 작품이다. 거대담론과 역사에서 깎여나간 나머지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지역사회의 많은 주체들과 그들의 지워진 목소리들을 연상시킨다. 구릉지를 따라 층층이 보이는 네모난 옥상들은 그 위에 펼쳐진 다양한 삶들이 한눈에 보이기에 이 지역에서 매우 특수한 장소성을 지닌다. 송주원(일일댄스프로젝트) 작가의 영상작업 「나는 사자다」는 3세대를 거쳐 온 가족의 역사를 통해 개인이 존중되지 않는 국가의 욕망과 사회적 잣대의 폭력 속에 살아내고 지켜낸(지키고 싶었던) 각자의 삶, 그 흔적을 길과 옥상 위에서 따라가 본다. 성유진 작가는 옥상을 지도로 만든 「마이크로히스토리맵」과 더불어 주민들의 오래된 사진을 수집하는 프로젝트 「기억수집」을 선보인다. 사진을 매개로 주민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대화와 이미지들을 통해 지역 삶의 단편들을 아카이빙 한다. 한편 허수빈 작가는 식물재배, 옥상다리 연결하기 등 옥상에서의 문화공간을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고안된 개인 프로젝트 『우리 옥상」의 워크숍을 진행한다.
삶에 개입하고 주민을 만나는 예술 이원호 작가×가천프로젝트팀(감기배, 김나윤, 김지유, 김진명, 김성현, 김태환, 이병우, 이준호)의 「태평프로젝트」는 옥상에 설치된 모스부호 라이트 작업 '태평등대'와 주차금지 오브제를 의자와 물물교환하여 사유화된 공간을 공유공간으로 바꾸고 수집한 물건들로 정원을 조성하는 '태평화원'을 선보인다. 또한 주민의 기억에 담긴 집을 그려보는 '집 초상화' 아카이빙을 통해 주거에 관한 개인성에 기반한 공동의 정서를 확인한다. 아라크네(김잔디, 박성진, 이계원)의 「태양공판장」은 '해를 파는 가게'라는 컨셉으로 지역민들과 '해'를 상징하는 유무형의 것들을 물물교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예술에 대한 낯섦을 허무는 동시에 '새로 이사 온 이웃'으로서 일종의 '집알이(갓 이사한 집이나 신혼집을 인사 겸 구경삼아 찾아보는 일)' 활동을 하며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서해영 작가의 「빈집살이」는 지역사회에 "티나지 않게" 미시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기반으로, 지역을 구성했던 한 가정(개인)의 삶에 작가의 현재를 더함으로써 빈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새로운 기억들로 공간을 재구성한다. 「2019 나의 태평−사라지지않는 1: 태평 1709번지」는 박성진 작가의 상상력과 특정 장소에의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소책자 배포 및 공간설치로 구성된다. 박양빈 작가는 빈집에서의 지난 삶의 흔적과 작가의 사적 삶이 혼재되는 설치작업 「Renewal:재개」 및 지역에서 발견한 장소, 구조물, 사이트 등을 기록, 관찰 및 상상을 통해 재구성한 일종의 예술로서의 지도인 「The Map of Shinheung」을 빌보드 형식으로 전시한다. 이 밖에도 주민에게 아이디어를 얻어 애니메이션 상영과 오케스트라 공연, 음식나눔으로 구성된 「골목 누워 영화제」를 개최하여, 골목의 언덕과 옥상에서 영화와 더불어 동네 풍경을 '새로이'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예술과 더불어 지역주민과의 접점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한다. 도시의 유휴 공간을 이용하는 프로젝트는 결코 새로운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폐허의 공간이 지닌 날것의 아우라와 장소 특정적인 설치 방식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동시대 예술의 전시 방식 중 하나이다. 정부의 주요 사업으로 도시 재생이 주목받고 예술이 '공공성을 강요받는' 일련의 흐름 안에서는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초현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폐허의 예술로 이해되거나 '착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읽히는 것을 지양한다. 오히려 서울 도시사를 간직한 성남 태평동 지역의 빈집과 골목 안에 실제로 몸담았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소소하게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지역에 발붙이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과 오롯이 관계 맺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미완에 가까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예술이할 수 있는 것이란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동네가 지닌 기억의 장소들을 기록하고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일 게다. 미약하고 소소하며 비생산적인 이러한 예술 행위들이 모여 태평동을 만들고 있는 개인의 삶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딛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 태평 빈집프로젝트는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경미
박혜수×배민경_어둠속에 부르는 노래_2019Day(낮) / 박혜수_I'm Sorry, but I didn't Know_금체인, 사운드(Hidden Song: 배민경), 혼합매체_가변크기_2019
박혜수×배민경_어둠속에 부르는 노래_2019Night(밤) / 배민경_오후의 노래_사운드 퍼포먼스_2019
1) 박혜수×배민경 「어둠속에 부르는 노래』 [장소: 태평4동 197번지, 아래층] Day(낮)-박혜수 「I'm Sorry, but I didn't Know」 2019, 금체인, 사운드(Hidden Song: 배민경),혼합매체, 가변크기Night(밤)-배민경 「오후의 빛」 2019, 사운드 퍼포먼스「어둠 속의 노래」는 낮에만 볼 수 있는 박혜수의 설치작품 「I'm Sorry, but I didn't Know」과 밤에만 볼 수 있는 배민경 작가의 사운드 퍼포먼스 「오후의 빛」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가 오히려 피의자가 되어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골방, 벽 뒤에서, 계단 밑에서, 어둠 속에 숨어서 혼자 노래를 부르는 내용을 담았다. 어떠한 이유로 사회에서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에 관한 작품으로, 어두운 빈집 내부에 설치된 거미줄과도 같이 얇은 금속 체인과 은은한 초의 불빛,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개인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업은 거대 담론과 역사에서 깎여나간 나머지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지역사회의 많은 주체들과 그들의 지워진 목소리들을 연상시킨다. 전시기간 중 이른 저녁 시간에 한 차례 진행되는 퍼포먼스 「오후의 빛」은 박혜수 작가의 전시 『어둠속에 부르는 노래』의 모티브인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제작된 음악 'Hidden Song'에 관한 사운드 공연이다. Hidden Song, 숨겨진 노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숨어버린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배민경 작가는 본인의 일기장에서 꺼내든 가사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순서를 바꿔 가사가 전달되지 않도록 했다. "때로 어떤 진실은 제각각으로 기억되는 여럿의 사실에 의해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오후의 빛을 붙잡기 위해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공연을 기획하였다.
이창훈_무의미의 의미_도배지, 장판_가변설치_2019
2) 이창훈 「무의미의 의미」 [장소: 태평4동 197번지, 윗층] 2019, 도배지, 장판, 가변설치이창훈 작가의 「무의미의 의미」는 빈집에 과거 입주했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빈집의 바닥재와 벽지를 새것으로 갈아입히는 도배 방식의 설치작업이다. 도배라 함은 흔히 새 집으로 거처를 옮길 때 과거의 흔적은 지우고, 이 집과 더불어 현재 보다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그 시작에 새 옷을 갈아입히는 행위와 같다. 그러나 이 도배가 여러 이유로 이제는 그 목적을 다하고 사라질 빈집에서 행해진다는 것, 그것은 오랜 시간 어떤 이의 고단한 삶을 함께하며 쉼터가 되어준 집에 대한 감사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길에 깨끗한 수의를 입히는 제의와 같다. 작가는 도배 행위를 차용함으로써 태평동이 지닌 이주의 역사와 지역에서의 삶을 반추하고, 사라질 예정인 삶의 터전, 집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유한다. 그러나 작업은 이전의 모습과 새롭게 도배한 모습 사이의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기보다는 현재(과거)와 미래, 현실과 이상의 교묘한 전복과 혼재를 야기한다.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삶을 유추해보게 하는 세월감이 묻은 버려진 물건들도 잠시나마 새로운 거처에 놓이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곳에 살았을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게 하는 기재로서 쓸모를 다시금 가지게 된다. 한편 이 모든 것이 곧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라는 작업의 전제는 또다시 이 모든 행위를 무의로 귀결시키고 만다.
성유진_기억 수집_수집된 사진들 - 70년 태평동 가족_2019
성유진_기억 수집_수집된 사진들
3) 성유진 「기억 수집」 「마이크로히스토리맵」 [장소: 태평4동 152번지 외] 「기억수집」, 「마이크로히스토리맵」 2019, 수집된 사진 아카이브 및 영상, 가변크기 [태평4동 152번지]「마이크로히스토리맵_지도그리기」 2018, 동판 에칭, 282×118cm [태평공공예술창작소 외벽]성유진 작가는 태평동 옥상의 드로잉을 모아 지도를 제작한 「마이크로히스토리맵_지도그리기」를 통해 지역의 풍경을 바라보고 느낀 태평동의 현재를 기록한 바 있다. 한편 지도 작업을 위해 리서치 하던 중 시작된 지역을 구성하는 주민들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의 오래된 사진을 수집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프로젝트 「기억 수집」를 기획·진행한다. 수집된 사진에는 1970년대 성남이 너른 밭이자 황무지였던 시절을 지나 90년대 골목에서 딱지치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동네와 삶이 만들어진 개인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주민들의 추억과 성남의 시간이 담긴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필름으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는 일종의 주민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대화와 이미지들을 통해 지역 삶의 단편들을 아카이빙하고 개인을 통해 태평동을 바라보도록 한다. 작가는 기록이라는 것은 반드시 사건과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기록 또한 그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순간들의 안과 밖에는 무한한 개인의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의 미시적인 관점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송주원(일일댄스프로젝트)_나는 사자다_영상_스틸컷
4) 송주원(일일댄스프로젝트) 『나는 사자다』 [장소: 태평4동 211번지 1층] 2019, 영상 및 사운드국가의 욕망과 폭력이 만들어놓은 20평의 땅은 성남 원도심 역사의 기록이자 상징이다. 송주원(일일댄스프로젝트) 작가는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진 태평동 옥상에 주목하여, 개인의 삶이 존중되지 않는 시간의 틈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동네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존재와 그들 각자의 삶을 영상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나는 사자다」는 한 소녀의 눈과 입, 몸짓을 통해 태평동의 골목과 옥상 위를 따라가면서, 3세대를 거쳐 온 가족의 역사 안에서 시대적, 사회적 잣대 속에 살아내고 지켜낸(지키고 싶었던) 각자의 삶, 그 흔적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현재의 태평동의 장소들을 오가며, 태평동에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거주했던 기억과 시간을 소환하고, 장소와 시간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그녀 모습과 마주한다. 구비 구비 고개를 넘어 도착한 태평동에서 우연히 만난 사자대문은 마치 그 집을 지키는 방패처럼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 듯하다. "나는 사자다"로 시작하는 나레이션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소녀의 삶의 단편들을 번갈아가며 읊조리고, 그들 각자의 이야기에서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며 춤으로 만들어진다.
서해영_빈집살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9
서해영_빈집살이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9_부분
5) 서해영 「빈집살이」 [장소: 태평4동 211번지 2층] 2019, 혼합재료, 가변크기서해영 작가는 태평동 211번지의 빈집 2층집의 구조와 벽지, 손때 묻은 장식 등 다양한 삶의 흔적을 장소에서 확인하고, 그 흔적들 위에 잠시지만 머물게 된 작가의 흔적과 기억들을 덧입히고, 곧 철거되어 사라질 이곳의 풍경을 중첩시켜보고자 한다. 「빈집살이」는 '빈집'과 '살림살이'를 합쳐 만든 단어로, 이곳을 채우고 있었을 다양한 살림살이와 집기,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조각과 설치의 방식으로 만들어 빈집을 다시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작가는 지역사회에 "티나지 않게" 미시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기반으로, 지역을 구성했던 한 가정(개인)의 삶에 작가의 현재를 더함으로써 빈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새로운 기억들로 공간을 재구성한다. 빈집을 작가의 작업실이자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고, 동네를 오가는 사이의 마주치는 주민들의 모습과 태평동의 풍경들이 주는 다양한 정보와 인상이 작가의 현재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민감하게 담아내고 빈집에서 전시한다. 이 과정은 우리의 삶에 존재했던 것과 필요한 것에 대해 질문하며 빈집 속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라크네_태양공판장_2019년 5월 10일의 기록:풍선과 곰
아라크네_태양공판장_2019년 5월 31일의 기록:처음 뵙겠습니다
6) 아라크네(김잔디, 박성진, 이계원) 「태양공판장」 [장소: 태평4동 1546번지 1층] 2019, 혼합매체, 가변크기팀 아라크네(김잔디, 박성진, 이계원)의 「태양공판장」은 '해를 파는 가게'라는 컨셉으로 지역민들과 '해'를 상징하는 유무형의 것들을 물물교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대상지인 태양공판장 1층 내부 전면에 위치한 커다란 거울 벽과 가게명은 작가에게 즉각적으로 이연승의 동시 「해를 파는 가게」를 떠올리게 하였다. 이 한적한 골목에 동시처럼, 거울에 반사된 해와 하늘을 파는 가게가 들어온다면? 텅 빈 공판장이 동시의 배경으로 재현된다면? 작가는 빈 점포를 해처럼 빛나고 희망적인 물건들을 교환할 수 있는 공판장으로 새로이 단장하여 지역민과 예술가 모두가 교류하며 해를 파는 가게 「태양공판장」을 재가동시키고자 한다. 5월부터 정기적으로 '해'를 주제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예술에 대한 낯섦을 허무는 동시에 '새로 이사 온 이웃'으로서 일종의 '집알이(갓 이사한 집이나 신혼집을 인사 겸 구경삼아 찾아보는 일)' 활동을 한다. 이는 지역 및 주민과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이후 사진, 동영상, 텍스트 등 결과물이 전시된다.
이원호×가천프로젝트_태평등대_조명 설치 장면 스케치_2019이원호×가천프로젝트_태평등대_조명 설치 장면 스케치_2019
7) 이원호×가천프로젝트팀(감기배, 김나윤, 김지유, 김진명, 김성현, 김태환, 이병우, 이준호)『태평프로젝트』 [장소: 태평4동 1546번지 2층 외] 「태평프로젝트-태평화원」 2019, 물물교환 및 공간설치 / [태평4동 1546번지 2층]「태평프로젝트–집초상화」 209, 주민들 집초상화 아카이브 설치, 가변크기 / [태평4동 1709번지]「태평프로젝트–태평등대」 2019, 모스부호 라이트 설치 / [태평4동 2591번지]이원호×가천프로젝트팀의 「태평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지역 사회를 리서치하고 기록하는 예술 프로젝트이다. 태평 2,4동의 골목 풍경과 거리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 리서치와 인터뷰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을 발굴하고, 개개인의 눈과 입에서부터 출발한 지역에 대한 감정들을 수집하여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확장시키고 그 지속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 프로젝트는 「태평화원」, 「집초상화」, 「태평등대」 총 3개의 프로젝트로 구성된다. 태평4동 1546번지 태양공판장 건물 2층의 가정집에서 진행된 「태평화원」은 주차 방지를 위한 의자나 드럼통과 같이 '거리로 나온 오브제'들을 의자와 교환함으로써, 골목의 사유화된 공간을 공유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물물교환과 인터뷰 과정에서 물건에 대한 히스토리를 기록하고 수집한 물건들을 화분으로 활용하여 실내 화원을 꾸민다. 주민들에게 익숙한 물건들로 채워진 화원은 사유와 공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기준들과 가치판단에 대한 시각들을 경험할 수 있는 녹색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활용된다. 전시 직후인 6월 23일 16시부터 전시에 쓰였던 식물을 나눔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1709번지 헤어포유에서 진행된 「집초상화」 프로젝트는 주민들의 집에 대한 개인의 기억을 그림 그리기를 통하여 기록한다. 마을과 집에 대한 오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집에 대한 애착과 현실적 감정 등이 충돌하면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을 통해 주민들이 생각하는 주거 공간에 대한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아카이빙한다. 이는 오랜 내부자의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 태평동의 모습을 기록하는 동시에 주거에 관해 개인성에 기반한 지역 내의 공동의 정서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2591번지 옥상에 설치된 「태평등대」는 모스 부호라는 언어를 조명의 깜빡임을 통해 전달하는 작업이다. 도심의 수많은 종교, 상업 공간들의 빛들 속에서 은은하게 깜빡이 모스부호는 주민 인터뷰에서 발췌한 희망의 단어들을 전달하는데, 해독이 어려운 암호와 같은 모스부호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김달_낮과 수정구의 밤_피그먼트 프린트_107×133cm_2019
김달_낮과 신흥동의 밤_피그먼트 프린트_108×82cm_2019
8) 김달 「낮과 수정구의 밤」 [장소: 태평4동 2591번지 1층] 2019, 사진 13점인근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방증하듯, 도시는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아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따라서 언젠가는 사라질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고 아카이빙하는 것은 예술의 중요한 행위이자 속성이다. 김달 작가는 1년간 신흥동과 태평동을 포함한 수정구 일대를 카메라로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구릉지 위, 용적률 기준에도 못 미치는 빽빽한 간격의 20평 집들이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 아래 위치한 풍경은 60년대 말~70년대 초, 이 지역이 형성되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누적 속에 만들어진 독특한 원도심의 풍경을 낮과 밤이 뒤섞이는 시간에 포착하여 시간의 흐름과 속도를 체감하게 한다. ● 폭 1미터 이상의 작품 5점을 포함한 13점의 사진은 모두 어스름하게 노을이지는 저녁 시간부터 밤 시간대 지역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전시장는 실제 촬영 시점을 재현하기 위해 색온도가 서로 다른 조명이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쉴 새 없이 변화하며 사라지고 재탄생하는 도시의 현재를 방증한다.
박양빈_Another Map (「Renewal:재개」 부분)
박양빈_The Map of Shinheung_빌보드 설치_148×200cm_2019
9) 박양빈 「Renewal:재개」, 「The Map of Shinheung」 [장소: 태평4동 2591번지 2층 외] 「Renewal:재개」 2019, 프린트, 가구 등 오브제 설치, 가변크기 [태평4동 2591번지 2층]「The Map of Shinheung」 2019, 빌보드 설치, 148×200cm [신흥공공예술창작소 외벽]박양빈 작가는 태평동 2591번지 빈집에서 남겨진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업 「Renewal:재개」를 선보인다. 작가는 1층 입구에 남겨진 '닭 집' 글씨, 2층의 아이 그림, 과격하게 뜯겨져 있던 벽지, 특이한 계단식 구조의 작은 방에 남아있는 옷걸이 등 거주자의 흔적들을 공간에서 확인하고, 이 멈춰진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들고 갈 수 있는 프린트 「Another Map」, 가족식탁이었다가 조카들의 놀이판이 되었다가 다시 작업테이블로 활용된 식탁, 오랜 기간 사용하지 않은 화장실 발판 등, 작가의 사적 시간을 담고 있는 가구나 물품들이 공간 안에 이전 거주자가 남긴 흔적들과 함께 배치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을 초월해서 관계를 형성하고 이 연속성 안에서 이전 거주자와 현재 사용자 사이에 연결점이 생성된다. 한편 신흥공공예술창작소 외벽에 설치된 빌보드 작업 「The Map of Shinheung」은 신흥동 지역을 작가의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서 재구성한 작업으로, 지도의 형식을 취하지만 정확한 지리를 표시하거나 경계를 나누고자 하는 기존의 지도가 아닌 상상의 공간으로 지역이 가지고 있는 밀도, 성격, 현상, 변화가 반영되어있다. 작품은 처음부터 완성에 관한 미리 정해진 이미지 없이 작가의 의식과 드로잉의 흐름에 선을 맡기어 지역을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연결되고 확장되는 공간으로 제시한다.
허수빈_우리옥상_옥상동호회 모임 및 문화환경 캠페인 프로젝트_2019
허수빈_우리옥상_옥상동호회 모임 및 문화환경 캠페인 프로젝트_2019
10) 허수빈 「우리옥상」 [장소: 태평4동 1709번지] 2019, 옥상동호회 모임 및 문화환경 캠페인 프로젝트허수빈 작가는 급경사의 언덕을 빽빽하게 메운 집들이 즐비한 태평동에서 옥상이라는 장소성에 주목한 「우리옥상」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지형적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바뀔 수 있다는 판단으로 신개척지로서 옥상을 바라보고, 원도심 태평동의 구릉지 지형을 한눈에 보이는 옥상에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문화를 만들고 일대의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옥상동호외 모임 및 문화환경 캠페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옥상 동호회를 만들어 옥상에 자기만의 문화공간을 구성하는 식물재배, 옥상다리 연결하기 등 다양한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한 연구소를 태평4동 1709번지 빈집에 운영하는 한편 태평 빈집프로젝트 기간동안 옥상 워크숍 1회 진행한다.
박성진_2018 나의 태평_태평동 1704번지 전경
박성진_태평동 1704번지 주차장 완공모습
11) 박성진 「2019 나의 태평–사라지지 않는 1:태평동 1704번지」[장소: 태평공공예술창작소 옆 주차장 및 외벽] 2019, 텍스트 소책자 및 설치「2019 나의 태평−사라지지않는 1: 태평 1709번지」는 박성진 작가의 상상력과 특정 장소에의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소책자 배포 및 공간설치로 구성된다. 박성진 작가는 2018년 태평공공예술창작소에 입주 후 비어있는 옆집, 1704번지를 기억한다. 바싹 붙어있던 빈집은 골목을 향한 면이 전부 유리창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뜨거운 한여름에는 건물 모퉁이를 휘감고 자라는 낯선 식물들의 터전이자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작가의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차를 마셨고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소이기도 했다. 2019년 3월, 사흘에 걸쳐 이곳이 철거되는 전과정을 지켜본 작가는 두 대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된 현재의 공간을 바라보며 작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1704번지에 대한 기억을 텍스트로 기록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또한 1704번지 빈 집, 현재는 주차장이 된 공터를 활용한 텍스트 설치작업을 진행한다.
김달·박승예 프로젝트팀_스무 발자국 낭독_영상_00:08:00_2019
12) 김달·박승예 프로젝트팀 「스무 발자국 낭독」 [장소: 신흥공공예술창작소] 2019, 영상, 00:08:00국가의 시작과 도시의 시작은 유사점들을 갖는다. 도시는 생명을 가진 양 진화하기도 쇠퇴하기도 하며, 팽창과 수축을 이어나간다. 성남은 서울의 위성도시, 최초의 신도시로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화로운 현재의 모습 뒤에는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그때 사람들의 역사가 존재한다. 성남이라는 도시의 태초의 역사(1960년대 말부터)는 2019년 현재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변혁과 급속한 진화 속 한 지점에서 생성된, 신도시의 '시작'은, 아직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억처럼 새로 태어나 살아온 이들에게 이어지거나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작가들은 다시금 말하고자 한다. 난개발로 비좁아진 골목 안에 그 역사의 당사자인 '사람들'이 여적 존재하고 있다고. 김달과 박승예 작가는 이 공존의 지점을 그림책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두 작가는 성남의 탄생시점부터의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 그 역사를 글, 그림 그리고 사진으로 이야기 한다. 태평 빈집 프로젝트에서는 그림책 「스무 발자국」을 작가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영상작업 「스무 발자국 낭독」을 선보인다.
■프로그램
1) 신흥공공예술창작소 오픈스튜디오 성남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신흥공공예술창작소는 예술을 매개로 지역과 소통하고 예술의 '공공성'에 관한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2017년 설립된 예술가(시각예술 및 기획)들의 창작공간이다. 오는 6월 22일과 23일 양일간 1기 입주작가 김달·박승예 프로젝트 팀(드로잉, 사진), 박양빈(설치), 박지혜(영상), 박혜수(설치), 이생강(기획)의 오픈스튜디오가 개최된다. 2년간 지역에 성남 원도심에 머물며 지역사회의 역사와 환경, 삶의 양태에 주목하고,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작업 결과물을 통해 지역을 바라보는 다섯 작가(팀)의 다양한 시선을 확인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일정6월 22-23일 12시-오후 5시장소신흥공공예술창작소 전관
2) 공공예술창작소 라운드테이블 공공예술창작소는 라운드테이블 『00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개최하여 예술의 개입으로 지역사회 및 주민과의 접점과 관계맺기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아트와 공공예술 기획 및 진행 경험이 있는 전문가 2인[박찬국(동대문옥상낙원 DRP), 박현진(성북문화재단 문화지역협력팀)]과 함께 개입과 관계맺기에 실패했던 사례들, 그리고 배울 점"에 대한 사례를 공유하고, "성남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솔한 대화와 고민을 나누는 기회를 마련한다. 제목『00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일시2019. 6. 22 (토) 오후2시 (2시간 소요) 장소태평4동 1709 (알뜰가전 혹은 헤어포유) 참여자패널 2인 / 박찬국(동대문옥상낙원 DRP), 박현진(성북문화재단 문화지역협력팀) 이경미(모더레이터), 정민혁·조성란(재단 창작지원부), 박다애·이수정(창작소 코디네이터), 입주작가 및 참여작가 대상주제에 관심 있는 일반인 및 관계자 50명 내외 참가비무료 문의031–783–8124 snsa@snart.or.kr INSTRAGRAM@publicartstudio_s 주최 성남문화재단 주관성남공공예술창작소, 성남시 도시재생지원센터 후원성남시 사업기간 프로그램 6월 14일(금) 18시30분 박혜수×배민경 퍼포먼스 및 오프닝 / 태평4동 197번지 6월 15일(토) 18시 팝업식당 (음식나눔) / 태평4동 197번지 6월 15일(토) 18시30분(1차) 골목 누워 영화제 / 태평4동 197번지 옥상 및 골목 6월 16일(일) 18시(2차) 골목 누워 영화제 / 태평4동 197번지 옥상 및 골목 6월 22-23일(토-일) 12-17시 신흥공공예술창작소 오픈스튜디오 / 신흥창작소 6월 22일(토) 14시 라운드테이블 / 태평4동 1709번지 6월 22일(토) 17시30분 네트워킹 파티 / 신흥창작소 6월 23일(일) 14시 허수빈 우리옥상 워크숍 / 태평4동 1709번지 6월 23일(일) 16시 가천프로젝트팀 식물나눔행사 / 태평4동 1546번지 문의성남문화재단 창작지원부 031–783–8124, snsa@snart.or.kr* 골목누워영화제 및 이원호×가천프로젝트팀의 태평프로젝트는 2019년 성남시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성유진은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회화 작가이다. Microhistory map(미시사 지도)은 2018년도 공공예술 창작소를 입주하면서 1년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이다. 개인의 공간인 옥상을 방문하고, 그 옥상의 기록을 드로잉으로 담아낸다. 1년 동안 진행 할 246채의 옥상 드로잉은 태평동의 현재를 기록한 지도로 완성된다. 작가는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 속에서 이 지역에 사는 분들과 만나고 태평동을 바라보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관람시간 월~토 10:00~18:00 (일요일 휴무) (* 전시기간 외 월~금 10:00~18:00)
[태평공공예술창작소] 성남시 수정구 시민로 248 (태평동 1703)
※ 주차장이 없으므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가용 이용시 현충탑 혹은 태평4동 공영주차장 이용바랍니다.
+ 성남문화재단 태평공공예술창작소에서 진행되는 「태평공공예술창작소 1기 입주보고」“안녕하세요”는 지난 1월 창작소에 입주한 4명의 입주 작가들이 처음 건네는 인사로 개개인의 작품경향과 앞으로 태평동을 배경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어떤 예술의 언어로 펼쳐질지 미리 엿볼 수 있는 시간이다. 이번 입주보고는 작가의 작업실을 볼수 있는 오픈스튜디오와 전시, 공공예술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이브페인팅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태평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태평공공예술창작소」에는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넓은 작업실도, 전시할수 있는 큰 공간도 없지만 작가들은 주민들과 같은 도시 공간에서 생활하며, 주민들과의 대화와 소통의 과정을 통해 생활공간에서 얻은 경험과 관찰로부터 예술적 아이디어를 담으며 “공공예술”에 대해 연구한다. 이로써 일상에서 예술을 발견하고, 일상으로부터 예술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공공예술”을 실현해보고자 한다.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길 사이 반듯하게 줄지어 선 다가구주택이 있는 태평동의 특징적인 풍경 속에 노후화되고 침체되어 있는 공간이 예술적 공간으로 변화되며 주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적 활기가 넘치는 태평동을 기대해본다.
구나현 담_감기걸린 집
작가의 담 시리즈 첫번째 작업인 「감기걸린 집」은 일정 시간동안 빈집에서 기침소리가 나도록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며 이웃의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설치 작업이다. 각자의 바쁜 삶 속에서 소통할 기회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한번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순간을 만들고자 한다.
허수빈 태평동 공공미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반지하 햇빛 들여 놓기
과거의 성남시 수정구 태평4동에서 벌어진 공공미술의 형태를 조사하고, 사진자료화 하는 전시로, 태평동 공공미술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더 나아가 그 미래를 구상해본다. 또한 「반지하 햇빛 들여놓기」 프로젝트는 옥상에 설치한 태양광 응집판과 거울 반사판을 이용, 햇빛을 좁은 건물사이로 유도하여 반지하 어두운 공간에 들여다 놓는 작업이다. 아이디어 스케치, 유사 활용사례, 1:12사이즈 실험모형이 전시된다.
박성진 공공예술을 생각하다_ 장소, 공공성, 그리고 예술
‘도시 상상 프로젝트’ 등 장소성에 천착하는 글쓰기를 해온 작가는 “문화예술을 매개로 지역과 소통이 가능하고 지역의 역사와 환경, 사람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소재로 주민들과 함께 실험적 공공예술을 모색할 수 있는” 입주자로서 태평공공예술창작소에 입소하였다. 장소성과 더불어 공공예술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작가는 이번 입주보고에서 공공예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한다. 존 월렛의 <도시 속의 미술(Art in City)>(1967)에서 처음 등장한 공공예술(Public Art)은 공공미술, 즉 ‘공공장소에 놓이는 미술’에서 출발했다. 그 후 오늘날 장소는 단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소통의 공간으로 확장되었으며, 공공성 및 예술성에 대한 정의도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공공예술을 생각하다 _ 장소, 공공성, 그리고 예술>은 태평동에서 앞으로 2년 동안 펼쳐나갈 공공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지역, 도시재생, 예술, 문화예술교육에 이르는 다양한 관심사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듣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예술지구_p ADP1관 및 주차장 드로잉 페스티벌 - 2017년 11월 20일(월) - 11월 29일(수) 쪼물쪼물 마켓 - 2017년 11월 24일(금) - 11월 26일(일) ... 드로잉 페스티벌 및 쪼물쪼물 마켓 오픈식: 2017년 11월 24일(금) 오후 1시 오픈
* 전시기간: 2016. 05. 27 Fri - 06. 19 Sun * 작가와의 만남 및 오프닝: 2016. 05. 28 Sat 오후3시 * 참여작가: 박성란, 성유진, 이선경
이번 전시는 콩테(Conte)를 주로 사용하는 여자작가 박성란, 성유진, 이선경작가 3인전이다. 콩테는 흑연, 목탄 등의 원료 광물을 미세한 가루로 만든 안료분과 점토를 섞어 물로 반죽해 다져 구운 재료로 연필보다는 무르고 농담이 뚜렷하며, 목탄보다 고착성이 있는 특징을 갖고있다.
박성란작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일어나는 무한생산과 소비, 현대인의 욕망과 집착을 몽환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성유진작가는 현대인의 마음 속 자리한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이선경작가는 자화상에서 출발하여 현대인의 무의식적 세계를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으로 표현한다. 다소 어둡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콩테라는 재료로 강렬하게 표현한 이들의 작품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선 하나하나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순간을 만날 것이다. / 맥화랑 큐레이터 김정원
대학로에 위치한 아트스페이스 정미소와 인접지역 성북동까지의 지역네트워크 프로그램일환으로 전시장 밖의 지역성과 예술의 순환성을 실험해 보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그간 공공미술을 비롯하여 마을 미술 프로젝트들이 많이 진행되었으며, 이는 특정 지역을 변경 시키고 작업을 영구설치 한다는 개념보다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색을 그대로 두되, 즉 그 지역성 그대로를 두고 예술 작업의 개입 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될 전망이다.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건물과 주변 환경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켜켜이 쌓아왔던 네러티브와 작가 개인의 주체적 시각이 같이 순환되는 상황을 연출하여 삶과 예술,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예술적 영역을 재확인 하는 작업이 될 전망이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정미소의 첫 번째 시도는 그 공간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적 조건을 고려하여 <Space installation Project Ⅰ: Seongbuk Street>를 진행한다. 전시장 안에서 선보였던 전시개념을 모두 전시장 밖의 상황과 환경의 조건에 상응하게 구성한다. 공공장소 중 특정장소를 선정하여 설치하는 프로젝트인 Space installation Project Ⅰ는 시작을 성북 길로 상정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길 뿐 아니라 공원, 정원, 빈 건물, 폐허 공간 등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는 설치 프로젝트이다.
전시장 안에서 보아왔던 작가들의 작업이 자연의 조건과 지나가는 사람의 개입으로 완성된다. 이 프로젝트는 공공미술에서 실현시킬 수 없었던 시도가 시작된다. 각 작가의 작업개념을 물리적 오브제로 한정시키기 보다는 공간 밖에서 실현시켜 보는 프로젝트이다. 작품은 철저히 과정 선상에 서 있게 되며 자연적 조건, 사람의 개입으로 달라지는 시간적 변이를 기록한다.
창작공간 p에서 1월 21일부터 2월 4일까지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연다. 창작공간 p 레지던시 입주기간 동안 공간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주변 환경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콘테와 목탄으로 그녀의 작업실 공간에 월 페인팅 형식으로 드로잉을 선 보일 예정이다.
인터뷰 형식의 도록을 만들기 위해 한 큐레이터와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나중에 지인을 통해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나와 인터뷰 했더니, 옛날 이야기만 줄기차게 하더라고 했다. 그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인터뷰라는 것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서 나름 최선을 다해 한다고 했을 텐데(말하는 건 언제나 자신없는 일이다), 작품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담기지 않아 상대방에게 맥을 빠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 그림을 이야기하려면, 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 작업의 일관된 주제는 ‘불안’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 삶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한다. 열두 살 무렵,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라는 공간에 머물렀다. TV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때 내게 문학적 소양이 있었거나 사색의 깊이를 즐길 수 있었다면, 글을 쓰거나 철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고, 자신을 부단히도 미워했다.
만약 10대나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지금 이 시기에 머무르고 싶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시간들은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개인으로서의 자신과 사회적으로서의 자신이 무던히 충돌하던 시기였고, 우울증 과 불안이라는 것을 망치질로 꾸준히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언제가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미약한 희망을 붙잡은 채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 다녔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라는 것도 불안이라는 것도 살고자 하는 버둥거림인지 모르겠다. 작업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 눈을 돌리니 많은 사람들이 불안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안고 가는 보편적인 특징인지도 모른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회자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고 또 한 세대가 온다면, 이것에 대한 특징이 어느 정도 정의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작업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겪지 않느냐고. 남들에 비해 불안을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그것을 작업으로 옮긴다고 해서 치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이제는 그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인지도. 초조함과 고통을 동반해 오는 불안이라는 것이 자신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는 것 또한 말이다. 불안은 언제든지 찾아 든다. 아니, 찾아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언제든 일어나 의식의 한 자리를 차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의식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처음엔 저항하다가 순간 온 몸의 기운이 빠지고, 감각의 스위치가 꺼지는 기분이 된다. 카메라에 불투명한 필터가 끼워지듯 시야가 아득해진다. 그나마 시선을 유지할 힘이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한때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 사이로 솟아나는 식물의 생명력을 찬양했던 한 인간이 이제 그것을 무심히 밝고 지나간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방대한 정보와 물질로 가득차 있다. 이런 것들이 소비를 조장하고, 지식 습득을 강요하며,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미디어에서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외모를 아름답게 가꿔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충고 한다. 텔레비 전을 거의 안 보는 나조차도 식당이나, 터미널에서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는 걸 멍하니 보고 있자면 어느새 설득 당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인터넷은 어떤가? 이젠 집안에 틀어박혀서 평생을 살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의 뉴스를 접하고, 새로운 개념의 이론과 지식 들을 습득할 수 있으며,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다. 심지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기존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왜 점점 공허해 지는 것일까? 친절하고 편리한 매체를 손 안에 쥐고서도 왜 점점 더 불편한 마음을 지니게 되는 걸까? 24시간의 하루를 보내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은 얼마나 될까? 길 위나 지하철 또는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스마트폰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식당에서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며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비난하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저렇게 쉴 틈 없이 무언가를 주입하면, 나중에라도 찾아오는 자신의 시간 속에서 풀어야 할 것들을 언제 바라 볼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간의 대화라는 것은 상대를 사람을 알아가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인데, 그것조차 차단시키는 모습이 내게는 놀라움을 자아냈다.
자살률이 높아지고,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점집이 호황을 맞고 있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불안정하고(우리는 미래지향적 인간일 거라는 가정 하에...), 현재에 만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불안의 시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의 시간이 사라져 가면, 그것은 전부를 차지한다. 생각하는 능력도 습관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나처럼 시간이 많은 사람도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몰입하려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응시하지 않으면 각종 매체의 유혹으로도 벗어나기 힘들고, 멍해지는 일이 많다. 내 작업이 불안과 우울이라는 것으로 출발하여 여전히 그것을 응시하는 것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10대와 20대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시기로 남겨진 안타까움이 불안과 우울로부터 도피하고, 사고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불안을 바라보려는 의식을 놓지 않았다. 어쩔 땐 그것이 내 온몸을 장악 할 때도 있었고, 분석을 통해서 원인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처음으로 돌아가 우울증의 시작점인 유년시절로 거슬러 가기도 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울까 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 또한 고행이었다. 이 정도면 알 것도 같다라고 느낄 때마다 새로운 형대로 나타나곤 했다. 그 무게감을 덜기 위해 일반화해보기도 했다. 여전히 그 과정 속에 있지만, 크게 변한 부분이 있다. 불안이나 우울이 해충과 같이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없애는 것도 불가능 할 뿐 더러,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불안이 다가오는 감도를 느끼는 감각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텍스트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걸 느끼기까지 내게는 꽤 긴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전시를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그림이 밝아졌다라는 말이다. 생각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그림에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불안이라는 주제로 작업한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어떻게 한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지겠는가? 다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자연스럽게 스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행복하다. 글 재주나 사고의 깊이가 그 리 깊지 않기에 철학적 담론을 풀어내지는 못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꾸준히 생각할 수 있다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전시 제목을 오래된 아이로 지은 것은 이 불안을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이 유년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로 되돌아가 보니, 그때의 그 아이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오래된 아이는 언제가는 내게서 떠날지도 평생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내 그림에 표현되는 고양이 인간의 형태가 아이로 묘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불안의 무게감에 짓눌리지는 않는다. 그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 졌다. 올해는 식물도감 작업을 위해 밖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식물을 관찰하면서 삶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삶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식물들의 성장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모든 과정이 신비로운 것과 동시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나 때때로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 불안 죽음 등도 자연스러운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다소 늦은 깨달음이지만, 이제는 삶도 작업도 조금은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가볍지 않게 또 너무 무겁지 않게....
■ 전시개요
전 시 명 : AGAIN
전시기간 : 2011년 9월17일 - 9월28일
전시장소 : 갤러리골목 space1,2
오 프 닝 : 9월17일 오후 6:00pm
전시작가 : 김수환, 문형태, 박주영, 박진성, 성유진, 유별남
전시장르 : 회화, 사진, 설치, 오브제
■ 전시컨셉
이번 전시는 "N-space 갤러리" 에서 시작해서 "갤러리 골목" 으로 새로이 자리잡기까지 만나고 함께 전시 해왔던 작가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그간의 변화해 왔을, 그리고 발전해 왔을 작업들을 함께 나누는 전시이다.
우리가 추구 하고 사유하는 이상향들은 그 절정에선 하나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예술은 각각의 삶의 과정에서 느끼고 성장해 가며 하나의 지점을 찾아 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어떤 지점을 향해 각자의 위치에서 걸어 가는 작가들과 그간의 변화하거나 성장해 온 각자의 작업을 통해 이야기 나누고 함께 다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변주곡처럼 각기 다른 개성의 변주들이 모여 어떤 지점에서 합일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흐르는 것처럼, 이번 전시를 통해 함께 성장해 온 작가들과 어떤 합일의 순간들을 찾아 가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Coreana Museum of Art, space*c
서울 강남구 신사동 627-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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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친숙한 교감의 대상이다. 그렇게 인간 사회의 지탱과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동물은, 예술 장르 전반에서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 지 오래다. 수 만 년 전 어느 동굴 벽에 그려진 동물그림이 우연히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동물은 인간의 예술작품에서 당대의 사회와 관념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간의 동반자로서 존재한다. 게다가 인간은 동물을 또 다른 생명체로서 존중한다. 게다가 동물의 생태에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인도주의적 보호의 의지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삶의 방식이 사냥에서 농업으로 전환되고 자연 정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동물은 인간 세상에서 폭력과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초 우리 사회가 목격한 끔찍한 사건들 몇몇을 되새겨보자. 살처분 된 수백만 마리의 동물, 더 높은 생산력을 강제 당하며 임신용 우리에 갇혀 지내는 암퇘지들, 인간의 기호에 맞게 유전자 개량되는 젖소 등의 현실에서 우리는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의 단면을 볼 수 있다. ● 코리아나미술관의 특별전 『Animalier 전』은 다양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무수히 회자되어 온 동물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을 시각예술의 틀 안에서 조망하고자 기획되었다. 전시의 제목 "애니멀리어(Animalier)"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동물을 주요 제재로 다루었던 화가나 조각가에게 붙여졌던 호칭이다. (대표 작가로 앙투안느 루이 바리(Antoine Louis Barye)가 있다.) 당시 그들은 초상화•종교화•역사화에 비해 하찮게 취급 받고 있던 동물화(Animal Painting)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다. "애니멀리어"는 이른바 동물-작가를 지칭하는 미술사 용어일 뿐만 아니라, "Animal"(동물) 단어와 인간 행위자를 뜻하는 접미사 "-ier"를 결합하여 동물-인간 사이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려는 본 전시의 주제어이기도 한다. ● 전시는 [인간의 동반자] [동물을 통한 자아성찰] [도구로서의 동물] [반인반수, 경계적 존재] 등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전시에 참여한 현대 애니멀리어는 동물에게 새로운 상징성과 관념을 부여하고, 현대 문명이 초래한 혼돈과 위기 속에서 동물과 맺어 온 인연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소개한다.
김남표_Instant Landscape-garden #7_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_193.9×130.3cm_2011
인간의 동반자● 인간이 동물을 삶의 반려자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다.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기계 같은 존재"(르네 데카르트)라는 주장에 대해서 "동물 또한 인간과 같이 고통 받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반박하였다. 이런 인식은 당시 활동했던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1724-1806)나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 1724-1804)의 작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동물에게 이입시키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본 전시에 소개된 애니멀리어 작품들로 이어진다. 김남표, 이종선, 임만혁의 작품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동물(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았다.
임만혁_말과 가족_한지에 목탄 채색_162.2×130.3cm_2010
동물을 통한 자아성찰● 애니멀리어 예술가들은 동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자기성찰을 위한 기회와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인식을 통해 행동을 결정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한다. 박종호와 곽수연은 동물의 행동에 자신의 삶을 이입시킴으로써 관람객들에게서 일종의 "성찰의식" - "어떤 행동에 대한 자신만의 동기와 이유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능력이 바로 사회 적응 능력"(니콜라스 험프리) - 을 불러일으킨다.
곽수연_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_장지에 채색_130×162cm_2011
박종호_Children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9
도구로서의 동물● 동물은 인간의 이익과 편의를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이 깊이 내재해 있다. 의학적․심리학적 목적에 이용되는 동물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린다. 세계 곳곳에서 빈번히 발행하는 동물 떼죽음은 인간의 무관심과 이기심의 결과다. 금중기는 인간화된 자연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동물의 감정을 표출시키며 현 시대의 위기를 강조하고, 송상희와 정정엽은 동물의 희생을 통해 무자비한 환경 파괴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다. 양승수는 인간의 놀이도구로 이용되는 동물의 모습을 포착하여 비정상적인 인간성을 고발한다.
송상희_변신이야기 제16권_연필 드로잉 애니메이션 HD_00:14:00_2008
양승수 _Treadmill_단채널 비디오_00:02:30_2010
정정엽 _고래_천에 아크릴채색_150×220cm_2010
반인반수, 경계적 존재●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을 의미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는 애매하고 기괴한 형상이지만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이 하이브리드 생명체는 초자연적 신비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 상징되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생명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반인반수 형상은 미와 추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계적 존재로서 모호한 정체성을 띤다. 성유진의 반인반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작가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 불안함, 불안정성이 동물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여 경계적 외연을 지닌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162.2×130.3cm_2010
『Animalier 전』에는 단순히 예술작품에서 동물의 형상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에서 벗어나 현대의 예술가들이 동물과 인간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그들의 고민이 담겨져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인간과 공생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동물을 대하는 대안적 시선을 함께 공유하길 바란다. ■ 이영주
미적 충만이 성취한 내적 치유 - 성유진의 회화를 읽는 네 개의 상징 ● 긋다 긋다, 즉 '그음'은 일획에서 시작된다.
첫 획을 긋는 행위는 씨알이 터지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한 번 시작된 그음은 그치지 않고, 한 번 움트기 시작한 싹은 멈추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획은 이랑을 이루고, 멈추지 않는 싹은 통나무가 된다. 하여, 획과 통나무는 결코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석도는 여기서 다시 새로운 사유를 펼친다. 그는 자신의 화론에서 '일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一劃者 衆有之本
万相之根", 일획이란 존재의 바탕이자 만물의 근원이란 뜻이다. 예술학적 해제를 적용하면, "한 획을 그음으로써 유위의 세계,
법의 세계가 출발하니 이것이 곧 예술의 시작"으로 읽힌다. 그는 획과 통나무가 다시 흩어져야 예술이 된다고 보았다. 이 흩어짐의
유위를 거쳐야만 회화가 되고 집이 되기 때문이다. 형호는 『필법기』에서 "형태라는 것은 그 형形을 얻어 그 기気를 남기는
것이요, 진真이란 기질이 모두 왕성한 것을 일컫는다.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며 상象은 죽는 것"이라고
했다. ● 획의 유위는 어떠한 상태로든 형을 얻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통나무처럼 스스로 존재를 획득한다. 형호가 말하는
'기'는 거기서 연유한다. 형의 획득과 기의 전유는 결국 일획에서 비롯된다는 두 사람의 주장은 화론의 핵심적
열쇠말keyword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오래된 화론의 해석을 단지 '말'의 뿌리가 아니라 말의 '주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획의 주체, 씨알의 주체는 곧 화가와 농부 그 자신이다. 석도가 자신의 화론에서 주장한 일획론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의 구현보다 '자아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형호의 '상'을 다시 보자. 왜 그는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라 말하고, "상은 죽는 것"이라 했을까? 여기서 아름다움을 전하는 형상은 곧 '회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象은, 形과 気, 真, 美를 발현시키는 근원적 주체일 터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데미안』의 아프락사스abraxas로
보면, 形․気․真․美는 알을 깨고 나온 새로운 세계이며, 象은 신세계를 위해 파괴된 옛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달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162.2×130.3cm_2009
예술은 예술가의 껍질을 깨고 나온다. 예술가는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예술은 미를 향해 날아간다. 그 미의 여신을 아프로디테라고 한다.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130.3×97cm_2009
상은 곧 예술가 자신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영혼을 태우지 않던가. 형호의 필법은 회화적 주체인 작가 자신을
불사르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예술의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석도 또한 첫 획을 긋는
주체의 자각과 인식을 통해야만 '법의 세계' 곧 예술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유진의 회화는 '긋기'에서
비롯된다. 그의 회화는 형호가 말한 '형'의 완성을 위해 '그음'의 이치를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음이 만들어 낸 세계,
성유진은 그 세계의 풍경을 위해 침묵의 수행을 감행한다. 하여, 그의 회화가 탄생하는 작업실은 그음의 수도원이며 또한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는 지난 수 년 간 오로지 긋기의 수행을 통해 形․気․真․美의 알을 키웠다. 그의 회화는 딱히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네 개의 미적 개념을 하나의 화면에서 혼융하고 뒤 섞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아로의 탈주를
모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회화적 탈주를 '탈아脱我의 미학'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 탈아의 미학이 길러낸 네
개의 개념(形․気․真․美) 속으로 좀 더 깊이 다가가 보자.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91×116.8cm_2009
形 성유진의 형은 고양이다. 그리고 이 고양이는 작가의 분신이며, 회화적 화자話者이다. 그의 일획은 고양이를 닮은
비현실적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출발한다. 반복과 지속의 리드미컬한 긋기와 형상의 아웃라인을 놓지 않으려는 의식의 집요한 긴장이
만들어 낸 이 인물은, 침적된 내면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옛 화가들의 초상이 전신사조伝神写照의
미학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인물의 정신을 포착했다면, 성유진은 의인화의 방식으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의 시각적 실재, 즉 이 인물이 고양이를 얼마나 닮았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내면의
실체를 최대한의 형상으로 구축하기 위해 획을 그었고, 결과적으론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일상을 공유했던 자신의 도반道伴 '고양이'로
표현되기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큰 눈과 넓은 이마, 작고 명료한 코와 입, 뾰족한 귀, 그리고 검은 머리칼, 길고 여린
손은 인물의 내적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중 눈은 바깥을 인식하기 위한 '바라봄'이 아니라 내면의 우주적 풍경을 세상으로
열어 놓은 '열린 창'과 같다. 그 창을 묵상하듯 응시하면, 한없이 깊은 은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몸은 어쩌면 은하를
품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 우주는 또한 대지와 같아서 다양한 상징을 싹틔우고 있다. ● 인물의
머리에선 뿔 같기도 나무 같기도 한 형상들이 자라나고, 때로는 연꽃을 닮은 '움'이 돋아나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각'이란 것이 실상은 '生角', 즉 사슴의 뿔로 풀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의 회화적 상상력이 얼마나 충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최근 작품들에선 이전과 달리 인물을 둘러싼 배경이 등장한다. 이 형상들은 잎으로만 이뤄진 숲이다. 그는 큰 나무나 혹은
나무들의 큰 숲이 아니라 아주 작고 여린, 미세한 곤충들의 숲을 보여준다. 이 숲은 바람에 일렁이기도 하고, 고요하며, 또한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는 초현실적 공간이다. 우리가 아주 낮게 다가서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세계인 셈이다. 이 숲에 둘러싸인
그의 인물들은 숲의 풍경처럼 고요하고 잔잔하며, 더 깊은 심연을 타전한다.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91×116.8cm_2009
気 형을 얻어 기를 남기다고 하였으니, 성유진에게 있어 기란 그의 회화들이 뿜어내는 느낌의 총체일 터이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통합적 느낌이란 것이 역설적으로는 낱낱의 모세혈관을 관통하여야 하는 것이니, 성유진의 회화를 단지 뭉툭한 시각적
아우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고양이 얼굴의 의인화된 작품들인데, 어딘지 외롭고 쓸쓸하다거나 무섭다,
소름끼친다, 슬프다 따위의 감성적 소감이야말로 성유진의 회화적 실체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것은 문득 바라본 이미지의 아우라일
뿐이다. 그러니 이 아우라를 기라 말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닐까. 그의 작품들은 수 천 수만의 획들이 덩어리가 되고, 형상이
되는 과정을 지난하게 거쳐 완성된. 그리고 그 획들은 자율적 리듬을 타고 지그재그로 또는 둥글게, 아니면 그물망처럼 얽히고
설켜서 그어지는 선들이 아니다. 그의 선은 반드시 일정한 흐름과 방향을 타고 그어진다. 인물만을 두고 보면, 그의 선들은 얼굴의
중앙인 코에서 사방팔방으로 확장되듯 그어지며, 선의 파장은 이 확장선을 타고 '바깥'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은 바깥을
향한 선들이 쌓여서 드러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형상들은 똑 같은 캐릭터들이 동어반복처럼 등장하는 단순한 구조로 볼 수도
있으나, 획의 흩어짐과 응집에 의해 사라짐과 드러남을 예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존재 결정론'을 부정한다. 마치
유사 결정론을 차용한 그의 개념은 고양이 형상에 함정이 있는 셈이다. 획의 응결에 의한 형상화가 고양이로 나타났을 뿐 그 본질은
하나의 획에 대한 그의 의지인 것이다. 형을 얻고 그가 남긴 기는 결국 획 그 자체이며, 그런 획이 응결하여 형상을 이룬 '내적
자아'일 터이다.
성유진_my room_천에 콘테_97×130cm_2007
真 기와 진은 둘이 아니면서 둘이다. 진은 '기(질)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획=내적
자아"의 충만함이란 진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미학이다. 충만, 바로 거기에 진의 핵심이 있다. 그러므로 진은 상象과
대치될 수밖에 없다. 충만에 이른다는 것은 주체의 해체와 영혼의 소진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유진은 무엇보다
이 진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상의 죽음이나 파괴, 소멸의 요구를 치유의 상황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그는 상처받은 자아의 표상을
회화로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폐에 가까운 '자기 소외'를 추궁하며 열린 세계의 소통을 꿈꿨던
그는 '그리기'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회화적 충만에 이르면 이를수록 그의 상처는 치유되었고, 혼돈에 찬
내면은 안정을 되찾았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를 시차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변화되어 왔는지, 얼마나 내적
안정을 이루어 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의 충만은 곧 내적 투쟁과 어루만짐의 과정이었을 터이다. 그 자신에
대한 우정과 환대 없이 어떻게 충만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가 성취한 '자아'에의 우정에, 환대에 깊은 긍정의
응원을 보낼 필요가 있다. 나는 모든 예술은 자기 치유화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성유진에게 있어 회화는 바로 그 길의
꽃들이며, 신발이고, 기쁨인지 모른다.
성유진_blooming_천에 콘테_122×122cm_2007
美 그것은 형과 기, 진이 제 삶의 언어로 혼합된 힘이다. 그 힘의 언어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예술가들의 궁극적 소망일
터이고, 성유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그 힘의 기세를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예술가는 그가 궁구한 만큼의 힘을
가지겠지만, 언제든 그것은 추락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상할 수도 있다. 이제 네 개의 상징을 품었던 상이
남는다. 象, 그것은 미의 탄생 뒤에 남는 빈 허물이지만, 결코 죽지 않는 예술의 주체이다. 상은 곧 성유진 자신이고, 우리
모두다. 그런데 나는 네 개의 상징보다 이 상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상이 없이는 예술이 결코 탄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이 없는 형과 기, 진, 미를 상상할 수 있는가? 보라, 상은 형과 결합해 형상이 되고, 기와 결합해 기상이 되며,
진상, 미상이 된다. ● 성유진의 회화는 슬픔이 기쁨에게, 기쁨이 슬픔에게 내미는 손과 같다. 그의 손은 끝없이 펼쳐지는 획으로
예술의 손을 그렸고, 의미화 했다. 그는 그의 작품과 손잡고 아름다움과 형상을 전하려 한다. 우린 모두 그 앞에서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로 손을 내미는 순간 그의 작품들은 '빈 허물'을 이기고, 새 몸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외딴 방'에 자신을 가두고 펼쳐 온 예술적 힘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성유진의 예술세계는 이제 어떤 전환의
시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이 내적 혼돈을 거친 뒤 다시 새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번 전시작들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전환과 변화를 통한 미의 모색이 '자아의 정치성'을 상실할 때 오는 느슨함은 경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품들이
외적으로는 보다 성숙된 필치를 내 뿜고, 내적으론 평온을 되찾았다고 해서 위에서 살핀 네 개의 상징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예술은 위험과 불안, 공포와 억압의 시대에 더 위대한 미학을 피워 올렸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회화가 '내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나로부터의 나이기도 하지만, 그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나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치유를 통한 사회적 치유의 가능성, 어쩌면 소통의 출구는 거기 있지 않을까! ■
김종길